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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ctures, Teaching & Presentations

현상학적 지식사회학 개관

by 사회학도

지식사회학 세미나 특강  2018/9/4/문사연 ‘물질’ 

김현준(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기본적으로 고전적인 지식사회학1은 지식(의식)과 (사회적) 존재의 관계(내적 연관)를 분석한다(맑스, 만하임). 지식사회학적 문제틀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관념사나 문화사의 관점에서 보면 지식사회학은 오랜 이분법의 토대 위에서 출발했으면서도 이 양자의 긴장을 유지 또는 극복하면서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2 내적 접근과 외적 접근이 그것이다. 한편으로 사상이나 이론의 내용 자체만으로 그것을 설명하는 내부적 방법이 있다(cf. 합리적 재구성).  이 접근의 한계는 설명과 이해의 수준이 관념적 수준이라는 동일한 존재지평 속에 머문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리적 결정론, 기술결정론, 유물론(생물학), 충동설, 이익 이론, (문화)관념론(반영론) 등 사상을 외부적 요인으로 설명하는 방법이다. 이 접근법은 소위 “상부구조”의 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환원주의나 결정론의 유혹에  쉽게 노출되었다. 오늘날의 (지식)사회학자들은 이를 “shot circuit effect”(부르디외)라고 비판한다. 

  칼 만하임에 따르면 지식사회학은 “사유의 존재구속성”을 확인하는 “사상의 사회적, 존재적 조건에 관한 이론”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것과 정신 외적인 것, 개별 문화현상과 사회적 환경, ‘문화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간의 관계에 관한 (구체적인 인간들의 지속적인 사회적 과정을 담지한) 집단적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맑스가 말했다시피, 인간의 의식이 그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 의식을 결정한다면, 지식사회학은 “사유의 모든 체계가 여타의 사회적 사실들에 의해 조건지워지는 방식에 관심”(Sprott 1954)을 두어야 한다. 

하지만 지식사회학은 곧 결정론을 버리고, ‘사회’나 ‘정신’ 그 어느 것에도 우선권을 부여하지 않게 되었다. 뒤르켐 식으로 보자면, 그것은 사고범주(분류체계)와 집단구조의 관계성을 집단표상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식사회학은 (객관적인) 사회적 관계와 그 관계의 (상호주관적) 의미의 연관을 탐색한다. 가령 전쟁은 물리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사건의 의미는 물리적 특징을 넘어서 해석자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과 교육 등에 따라 다른 관점으로 이해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연관된 사실은 사전에 형성된 가치평가의 사회적 체계에 비추어 선택되고 중요성이 부가된다. 베르너 슈타크에 따르면 지식사회학자는 칸트와 같은 비판적 인식론의 후예이다. 지식사회학자도 ‘아프리오리(a priori)’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선험적인 것은 철학자들과 달리, 공통적 의미의 공유이다. 다시 말해 전쟁의 의미란 사실 자체 속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하나의 전체로서 조망하는 인간정신에 의하여 공급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사전에 품고 있는 또는 전수받은 집단적인 가치의 체계를 통해서 우리는 전쟁의 의미를 인식한다(슈타크 1983:30).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와 이 객관적 관계가 오늘날 갖는 “갑”과 “을”이라는 의미, 즉 “갑질”과 (을이 당하는) “모욕”이라는 의미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관계 내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위치와 이러한 관계 속의/관계에 대한/관계를 통한 실천적(일상적) 지식은 단지 객관적인(초주관적인) 관점에서만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갑과 을”로 표상되는 상징적이고 관계적인 의미를 - 상호작용을 - 통해서 구성된다. 즉 사회구조에 대한 분석은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에 참여하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들이 갖는 의미를 포함하는 해석적 기준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Hamilton 1974: 136). “사회적 실재는 어떤 자연적 실재라기보다는 의미구성체로서 간주된다. 즉 사회적 실재는 그것이 참여자들에게 의미를 갖는 한에 있어서만 존재한다”(Hamilton 1974: 136).

다시 말해 사회적 현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사실상 그 현실과 동일하다는 것이며(Hamilton 1974:187), 지식으로 당연시된 것은 지식 그 자체와 동일한 것이다(Hamilton 1974:191). “모든 지식은 인간의 상호작용에서 생성된 하나의 구성물이며, 이 지식의 구조는 사회적 현실(reality)에 부합되게 생산된다.” 따라서 지식을 사회적 실재와 분리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Hamilton 1974:136). 결국 지식사회학에서 “knowledge” = “reality”이다.  

* 지식사회학의 지적 계보와 범주
1) 고전적 지식사회학(맑스, 뒤르켐, 셸러, 만하임): 거시적 지식사회학 
2) 암묵지의 사회학: 현상학적 지식사회학(슈츠, 버거, 루크만), 실천이론(기든스, 부르디외) 
3) 과학적 지식사회학: 지식분야/지식인 집단에 대한 사회학(미시적 지식사회학), 제도주의 과학사회학(머튼),       과학지식사회학(블루어, 반즈), 성찰적 사회학(부르디외)  


  지식사회학에서 현상학의 지위와 그 영향력은 매우 중요하다.3 지식사회학을 창시하고 그 기초를 세운 막스 셸러와 칼 만하임은 모두 후설의 영향을 받았다(이남인 2007:11). 물론 그 둘은 이후 현상학과 결별했다(이남인 2007:11). 
  만하임의 지식사회학은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적 사회학)과 유사하다(이남인 2007:33). 만하임은 “사유(지식)의 존재구속성”을 연구하는 자신의 지식사회학을 “사유의 현상학적 관점”이라고 말했으며, 지식의 존재구속성을 “현상학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사유 또는 지식을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와 사회 “세계”의 구조를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역사나 사회적 세계의 제약 조건 하에서 구체적인 지식이 형성되는 발생과정을 해명한다는 점에서 지식사회학은 발생적 현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이남인 2007:33).   
  후설의 제자 알프레드 슈츠, 그리고 슈츠의 제자 피터 버거와 토마스 루크만 등은 현상학을 지식사회학적으로 전유했다. “자연적 태도의 판단중지”를 통해 규칙을 생성해내는 보통사람들의 방법을 탐구한 가핑클의 민속방법론도 현상학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현상학의 주된 과제는 지향적 경험을 하는 의식의 구성과 구조를 기술하는 것이다(하홍규 2013:115). 후설은 의식경험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의식경험의 근거로 여겨지는 실재에 대한 선입견(믿음)을 괄호친다. 후설에게서 경험은 형상(eidos)이나 본질적 구조를 따르는 의식의 구성활동이다(1998[1983]:292). 예컨대 각자가 경험하는 다양한 모습의 고양이(같은 무엇)는 “고양이”라는 형상의 사례로서 경험된다. 또한 “반려동물”로서, 또는 “들짐승”으로서 또는 “공포의 상징”으로서 경험될 수도 있다. 또 가령 2차원의 종이 위에 그려진 4차원의 정육면체(선들)는 입방체로서 지각된다. 그것은 의식의 구성 작용 때문이다. 따라서 경험이란 의식의 외부에 명확히 존재하는 주어진 물리적 실체의 자극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슈츠의 저서, The Pheonomenology of the Social World(1932), The Structure of the Life-World(1973) 제목에서 엿볼 수 있다시피, 그는 자신의 사회학을 사회현상학이라고 부를 만큼 후설의 현상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생활세계”, “epoche(현상학적 환원)”, “자연적 태도” 개념들은 이후 현상학적 사회학의 기본 개념들이 되었다. 
  슈츠는 베버의 이해사회학을 극복하기 위해 후설의 현상학을 도입했다. 기본적으로 베버의 이해사회학은 현상학에 친화적이었다. 베버의 일반적 이해사회학은 경험적 이해사회학이 해명하고자 하는 사회현상의 ‘근본개념들’과 ‘범주들’을 해명하는 것이다(이남인 2007:29). 이러한 베버의 일반적 이해사회학은 사회현상의 ‘본질구조’를 파악하려는 ‘존재론적 현상학적 사회학’이라고 할 수 있다(이남인 2007). 슈츠의 현상학적 사회학은 두 가지 측면에서 베버의 이해사회학을 계승, 발전시켰다. 첫번째는 베버의 경험적 이해사회학이고, 두번째는 베버의 일반적 이해사회학이다. 슈츠는 자연과학적 태도나 실증주의적 태도에 대해 판단중지를 통해 (사회학적인) 현상학적 환원을 수행함으로써 베버의 경험적 이해사회학이 탐구하고자 했던 주관적 의미를 가진 사회적 행위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게 된다. 또한 슈츠는 사회 현상의 근본개념들과 범주들을 ‘전형’으로 설명함으로써 선험적(초월적) 현상학의 유아론을 벗어나 사회세계의 토대로서 상호주관성을 강조했고, 베버의 일반적 이해사회학(‘이념형’)을 심화시켰다.  이외에도 딜타이, 베르그송, 막스 셸러, 윌리엄 제임스가 슈츠에 영향을 주었다.  

  피터 버거의 현상학적 지식사회학은 후설의 제자인 그의 스승 알프레드 슈츠를 통해 현상학의 전통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렇다면 현상학적 사회학과 현상학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까? 이남인(2011)은 슈츠의 현상학적 사회학과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이 무관하다는 견해를 반박하면서 전자가 후자의 토대에 기초했을 뿐만 아니라, 전자를 후설의 현상학적 심리학의 사회학적 판본으로 이해함으로써 그 연속성을 강조한다. (초월론적) 현상학과 (현상학적) 사회학은 모두 “실재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해서는 괄호에 넣고, 의심에 경험되는 실재로서”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하홍규 2014:130). 또한 현상학적 사회학은 후설이 제시한 상호주관성 개념을 발전시켰다.  

  후설의 “현상학적 판단중지” 또는 “현상학적 환원”은 의식에 나타나는 사태의 본질 - 지향적 체험의 구조와 본질 - 을 파악하고 그것을 기술하기 위해 실재에 대한 당연시된 믿음의 태도를 중지하는 것이다. 즉 사물의 궁극적 본질에 대한 판단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로써 현상은 실재에 대한 어떤 믿음에 근거하지 않고서 현상으로서 고려될 수 있다. 즉 현상학의 판단중지는 데카르트의 철학적 회의의 방법을 급진화함으로써 자연적 태도를 극복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하홍규 2014:118-119n).  

  하지만 슈츠는 후설의 초월적 현상학이 유아론의 한계를 가졌다고 비판했다. 슈츠에 따르면 후설에서는 상호주관성이 아니라, 초월적 주체성만이 절대적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또한 현상학적 사회학의 방법론(판단중지)은 현상학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측면이 있다. 사회학적 판단중지는 이론적 태도가 아니라 자연적 태도를 가진 일상의 행위자들이 존재(실재)에 대한 의심을 중지하는 “자연적 태도의 판단중지(epoche of the natural attitude)”이다.  따라서 현상학적 사회학자들은 상호주관성이나 사회의 기초가 의심을 유보하는 자연적 태도에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의심을 중지함으로써 이 세계를 문제없이 살 수 있다(하홍규 2014:131). “일상생활의 실재는 실재로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그 실재는 단순한 현존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부가적인 검증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그곳에, 자명하고 거부할 수 없는 사실성으로서 존재한다. 나는 그것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 실재에 대하여 의심을 품을 수 있지만, 매일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살아가려면 그러한 의심을 중지해야 한다”(버거, 루크만 2013:46). 

현상학은 우리에게 현상학적 판단중지의 개념, 곧 데카르트의 철학적 회의의 한 방법을 급진화함으로써 자연적 태도를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서 세계의 실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중지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 제안을 다음과 같이 과감히 고칠 수 있다. 자연적 태도 안에 있는 사람도 특정한 판단중지의 방법을 사용한다. 물론 이것은 현상학자의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는 외부 세계에 대한 믿음을 중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존재에 대한 의심을 중지한다. 그가 괄호 안에 넣는 것은 세계와 세계의 대상들이 그에게 보이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의심이다. 우리는 이러한 판단중지를 자연적 태도의 판단중지라고 부르기를 제안한다(Schutz 1967:229; 하홍규 2014:132에서 재인용).  

이렇듯 현상학적 사회학은 “현상학에 충성스런 신하라기보다는 현상학을 훔친 사회학적 해적”(Ainlay 1986; 하홍규 2014:126n 재인용)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현상학적 사회학의 서사는 다음과 같이 서술될 수 있다: 우리는 ‘나’ 이전에 앞서 주어져 있는 ‘우리’(셸러; Schutz 1973:167)라는 집합적으로 선험적인 사태의 바탕 위에서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된 상호주관적 의미체계를 외부의 객관적이고 질서있는 “실재”, 즉 “자명하고 거부할 수 없는 사실성”(버거, 루크만 2013:46)으로서 공유하고 객관화하여 경험하면서도, 이러한 경험적 실재가 우리가 만든 역사적/집단적/상호작용적 의미 구성 과정의 산물임은 (부분적으로) 의심하지 않고 망각함으로써 별다른 문제없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한, 실재에 관한 존재론적 물음이나 인식론적 물음과 같은 학자적이고 이론적인 의문은 제기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다.  이렇게 의심을 중지하고 망각하는 것은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자연스럽고도 필수적인 태도이다. 다시 말해 의심을 중지하는 자연적 태도를 가진 사람들의 상호작용을 통해(외재화) 일상적 현실 또는 실재가 구성되며(객관화), 의미있는 실재로서 경험되는 것이다(내면화).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현실은 객관적 사실성과 주관적 의미의 결합물이다.   

  지식사회학은 이 사회적 실재 - 실재가 인간의 의지와 주관성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은 인간에 의해 집단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 에 대한 의심을 “판단중지”함으로써 일상을 무리없이 구성해 나가고 (그래서 객관화된 실재를 창출해내고) 있는 사람들의 상호주관적 의미세계를 탐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재란 인간의 의지로부터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로서 “인정되는 현상”을 의미한다(하홍규 2014:129).   

  버거는 지식사회학의 방법론으로서 판단중지를 추가한다. 실재에 대한 당연시된 믿음을 폭로하기 위해 실재의 본질에 대한 사람들의 자연적 태도에 대한 가치판단을 괄호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상에서 실천하는 실재를 의심하지 않는 보통사람들의 판단중지의 방법의 도덕적 가치를 판단중지하는 것이다. 버거는 사람들이 “실재”라고 인정하는 현상들을 가치판단하지 않고 그(사태) 자체로 받아들임으로써 보통사람들의 상식적 지식과 사회학자(이론가)의 지식의 인식론적 우위에 근거하지 않고 그들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현상학적 이해는 당연시된 실재를 낯설게하고 폭로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지식사회학은 현상학적 해석학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의심의 해석학”이다. 
  오늘날 재발견된 지식사회학은 참된 믿음은 이성의 결과이고, 거짓 믿음은 감춰진 비합리적 힘의 결과라는 이분법을 기각한다. 사회학이 도덕에 무관심해야 한다는 버거의 입장은 흔히들 오해하듯 단순한 (윤리적) 상대주의의 표명이나 (사회학자의) 윤리적 무책임성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류의 사회학에 대한 현대 과학지식사회학의 비판과 공명하는 동시에 베버의 가치중립성 테제와 직업으로서의 학문적 자세를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버거는 사회학적 현상학의 방법을 통해 당연시되고 정당화된 현실(reality)과 믿음(지식)을 폭로하는 결과에 이른다. 결국 사회학은 “학대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신화들의 정체를 폭로함으로써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2012:32)한다고 주장한다.
1 Sociology of Knowledge; Social/Sociological theory of Knowledge; Social Epistemology
2 레이몽 부동(2017)에 따르면 신념(지식)을 설명하는 이론을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신념(지식)을 참/거짓으로 구분하는 이론이다. 둘째는 신념(지식)을 효용성으로 평가하는 방식이다(실용주의). 셋째는 믿음의 원인을 물질(유전자)에서 찾는 자연주의(생물학)이다. 넷째는 믿음의 원인인을 문화에서 찾는 구성주의이다.  
3 다양한 유형의 현상학적 환원 및 사회학적 현상학적 환원 방법에 대해서는 이남인(2007)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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